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는 정해진 루트 몇 개가 있었다.
공부를 잘하거나 게임을 잘하거나 무모한 짓을 잘하거나.
다른 사람이라면 그림을 잘 그리거나 축구를 잘하거나 노래를 잘하거나 뭐 여러 가지가 더 있었겠으나,
내 좁은 세상 안에서는 이게 전부였다.
위 세 개 중 그 무엇도 어중간하게 못하던 친구 KT는 팀게임을 질 때면 비난과 원망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럴 때면 실없이 받아주거나, 소심한 반박을 하며 마무리되었다.
대학을 가고도 좋은 친구들 덕분에 3학년 같은 반 모임은 유지가 되어, 우리의 관계는 끊기지 않았다.
이십 대 초반, 같잖은 자존심과 호승심으로 뭉친 우리에게는 못난 문화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모임 자리에서 여자친구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거나 전화를 받는 자에게 거센 비난을 퍼붓는 것이다.
“이 새키 이거 잡혀 사네. xx 떼라”
“임마 이거 사랑꾼이네 사랑꾼. 대~단한 사랑꾼 납셨어”
드라마나 코미디에서도 자주 나오는 장면이니 어리석은 사내놈들의 보편적인 문화일 것이다.
“저기 부장님, 오늘 시간이 늦었는데 갑자기 저희 다 같이 가면 형수님이 싫어하지 않으실까요?”
“쓰읍. 헛소리하고 있어. 내가 간다면 가는 거지. 와이프 꿈쩍도 못해!(매우 쫄림)”
이는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덕목이었으며 타겟을 가리지 않았다.
그럴 때면 타겟은 멋쩍어하거나 시답잖은 변명을 늘어놓기 바빴으나, KT는 달랐다.
“(갖은 비난에도 영상통화를 하며) 어 얘가 섭이고 얘는 원자, 얘가 마경이고 얘는 배기. 배기는 알제?”
“응~ 나 사랑꾼 맞아.”
KT는 우리의 공격을 유연하게 받아내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자신의 길을 갔다. 여자친구한테 완전히 취해서 민폐를 끼치며 친구 관계를 등한시하는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KT는 당당하고 멋있었다.
우리는 우리끼리의 룰이라는 허상에 갇혀서 당연한 감정과 행동에 당당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스레 여자친구랑 통화만 끝나면 진심도 아니면서 ‘아 귀찮게 구네’ 하고 혼잣말을 하며 허세를 부리는 인간상이 있다. 저 정도까진 아니라도 여자친구에게는 차마 말 못 할 얘기를 우리에게 성토하거나 의견을 구하는 경우는 많다.
나는 사실 이걸 나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상호 간의 예의일 수도 있으니까. 너무 깊은 생각까지 아는 것이 오히려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까.
KT도 사소한 불만이 당연히 있겠으나, KT는 여자친구한테 하지 못할 얘기는 우리를 포함한 누구한테도 하지 않으며, 나는 태어나서 이런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으레 부장님한테 받은 상처는 동료한테 풀고, 동료한테 받은 스트레스는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이는 꽤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다. 여태까지 본인은 남친의 생각을 다 알고 있으며, 내 손바닥 안에서 논다고 착각할지도 모르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그럴 경우 일부의 거짓말이나 진심을 눈치챘을 뿐일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다.
KT 얘 존나 멋있는데?
낯선 생각이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못 했는데 갑자기 훅 떠올랐다.
공부, 게임, 광기는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무의미해지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꾸준함과 일관성, 줏대와 자신감을 가진 친구가 좋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자신이 가진 장점을 변치 않고 지키는 친구를 점점 더 높게 평가하게 된다.
KT는 졸업 직후 입사한 회사에서도 착실하게 6년 넘게 잘 다녀 대리가 되었다. 물론 불평불만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잘 다니고 있다.
군 전역 이후 처음 만난 여자친구와 5~6년 간의 연애를 한 KT는 지금도 변함없는 태도로 여자친구를 대하고 있다.
그는 이제 ㅇㅇ고 최수종으로 불리며, 작년에 결혼을 하여 내년엔 아기 건빵이를 낳을 예정이다.
이번 추석에 그와 나눈 대화이다.
“KT 내일 뭐하노”
“어 내일 여자친구 만나서 가족들이랑 밥 먹는다”
“어 이새키 여자친구도 생겼냐?”
“난 아직도 여자친구라고 생각한다.”
너무 멋있어진 놈에게 이제 어설픈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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