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이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도구로 쓰였다는것을 독자에게 들키면 안 된다.
이 책은 자꾸 나를 소설 밖으로 끄집어낸다. 내가 도저히 작품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여러 가지가 나오며 자꾸 작가의 출신, 배경, 나이, 성별, 경험을 의심하게 한다.
주인공 세린이는 여고생이지만 글을 읽는 내내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라고 생각되게 되는 지능과 판단을 보여준다.
요즘 고등학생의 장래희망은 단연 유투버, 아이돌, 의사이다. 그리고 그를 넘어서서 더 어린 아이들조차 '돈 많은 백수'를 적어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에 반해 세린이가 생각한 하나뿐인 소중한 소원이라고 처음 생각한 것이 '좋은 대학 가기'이다. 그리고 그를 잠시 들여다보고 나서야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딱히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다음 깨달음을 얻은 뒤, 고작 생각한 것이 '좋은 직장 가기'이다.
이런 식으로 전개할 거면 들여다보는 내용이 재밌기라고 해야 한다. 직장 생활의 어마어마한 치정극에 휘말리거나, 상상도 못 할 끔찍한 상사를 만난다거나, 법적 책임에 휘말린다거나... 아쉽게도 그런 것은 없다. 그저 회사를 안 다녀봐도 알 수 있는 아주 전형적인 평범한 직장인의 애환을 묘사해 놓았을 뿐이다.
여기까지 보고 작품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 작가 회사 안 다녀본 것 같다.
- 대학도 제대로 안 다닌 것 같다.
- 여고생은 당연히 아닌 것 같다.
작가는 순수한 아이의 성장과 사고의 확장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과정에서 화자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세린이는 이야기를 써내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고, 작가에 의해 저능아가 되어버렸다.
이 정도의 전개 속도라면 세린이를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만드는 방법도 있었겠으나 그러면 '불행을 판다'는 컨셉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 같다. 초등학생이 어렵게 살아봐야 얼마나 어렵게 살았겠으며 그에 대해 사람들이 공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지능과 영혼을 잃어버린 괴이한 고등학생이 되어버렸다.
상점 입구에서 불량한 고등학생들이 할아버지에게 티켓을 삥 뜯으며 나온 대사이다.
(할아버지가 티켓은 절대 줄 수 없다며 사수할 때) "아무래도 우리 할아범이 본인 뼈가 아직도 딱딱한지 시험해보고 싶은 모양이지?"
(위협 후에 할아버지가 두려워하자) "뭐야 조금 전까지 자신만만하던 영감님은 어디 갔나?"
작가의 말을 보면 학창 시절 괴롭힘도 받았다고 되어있는데 나는 작가가 진짜 괴롭힘을 받았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작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욕을 써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으며, 남에게 위해를 가한 적은 물론 없고, 그런 장면을 목격조차 하지 않아 본 것 같다. 그런 사람이 불량한 고등학생을 묘사한다면 이런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는 저 대사를 다시 보며 부끄러워할까 아니면 뭐가 잘못된 건지 가늠조차 하지 못 할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래도 이 소설을 보면서 좋았던 점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고양이에 대한 묘사가 좋았다.
이 사람은 확실히 고양이를 키워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은 다녔는지, 회사는 다녔는지, 불량 청소년을 만난 적이 있는지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으나 고양이를 잘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하나 살아있는 것이 없는 이 소설에서 영혼이 있는 것은 단연 고양이 잇샤이다. 나는 고양이를 키워보지 않았지만 고양이 잇샤에 대한 묘사는 충분히 사랑스럽고 역동적이었으며 귀여운 외형에 대한 상상을 하게 했다. 이 책을 본 다른 지인 A는 13년 차 집사인데, A는 '이 사람 고양이 안 키워본 것 같다. 길고양이 밥 정도는 준 것 같다'라고 했다. 아무튼 잇샤를 나는 귀엽게 잘 봤다.
두 번째로 못된 도깨비가 훔치는 생각은 귀여웠다.
초반에 나오는 올해의 도깨비상을 받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훔치는 도깨비는 식상했다. 그 뒤로 나온 여러 도깨비도 기억에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쉬는 날 씻고 싶은 마음'을 훔치는 도깨비는 좀 웃겼다. 인간에게서 오래된 기억을 훔쳐서 힘든 기억을 잊고 아이를 다시 낳게 하는 도깨비도 좋았다. 사소하면서 놓치기 쉬운 귀여운 포인트를 잘 짚어냈다고 생각한다.
독서 모임에서 공통적인 의견으로, 이 책은 글이 아닌 영상으로 만들었으면 꽤나 예뻤을 것 같다고 했다. 나도 동의하며 잇샤가 어떻게 묘사될지 대단히 궁금하다. 필력은 떨어지지만 세계관에 대한 묘사는 나름 멋진 영상으로 엮어낼 수 있을 법도 하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았지만 이 소설은 요즘 굉장히 핫한 책이고 크라우드 펀딩에도 성공했으며 엄청나게 잘 팔리고 있다. 무엇이 독자들을 움직였는지 생각해 볼 필요는 있겠다.
이걸 읽을거면 비슷한 계열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추천하며, 다른 분들은 <달러구트의 꿈백화점>을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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