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다 보니 촬영 현장을 자주 목격한다.
여의도에서는 출근길, 풍경 같은 걸 찍는 카메라를 자주 볼 수 있다. 뉴스에서 쓸데없는 얘기할 때나 애국가 나올 때 틀 것 같은 장면을 따는 것이다.
어느 날에는 지하 도로에서 유럽 모델이 화보 촬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에는 흰 쫄쫄이, 노란 쫄쫄이를 입은 유튜버가 촬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에는 양아치 아프리카 스트리머가 야외 방송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에는 카페 앞에서 연인 역할로 보이는 남녀가 촬영을 하고 있었다. 유튜브용 웹드라마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한동안은 문 닫은 가게 앞에 [드라마 ㅇㅇㅇㅇ 촬영중 협조 바람]이라며 촬영용 벤이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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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집 앞에서 영화촬영을 하고 있었다. 인도를 점령하고 있는데 따로 통제는 안 하고 있어서 눈치를 보며 사이로 지나갔다.
중간에 사람도 두어명 서있어서 아직 뭐 안 하는구나 싶었다.
즉시 한 스태프가 나에게 다가왔다. 35세쯤 된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로 보였지만 말단 스태프였을 테니 이십 대 중후반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죄송하지만 영화를 찍고 있는데 배우가 여길 뛰어갈 예정이니 가능하시다면 저랑 같이 이렇게 벽에 딱 붙어서 가주면 좋겠다.”
스태프는 워낙 친절했고 시간 여유도 있어서 흔쾌히 협조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시간이 괜찮으시면 여기 골목에서 잠깐 기다리셔도 되겠느냐. 사실 길에 서있는 다른 분들은 다 보조 출연자분들이시다.”
아 그랬구나.
스태프는 나에게 두 번째 죄송한 요구를 했다.
난 그 생소한 상황이 재밌어서 스태프와 걸어가다가 작은 골목이 있어서 거기에 빠져서 대기했다.
“정말 죄송한데 차에서 카메라를 통해 이쪽을 찍을거라서 벽을 보고 있어서 되겠느냐.”
짧은 시간에 세번째 요구사항이 전해졌다.
배우는 길을 뛰어가고 카메라는 차에 실어서 촬영을 하는 방식이었다.
이 스태프한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사실 난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고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좁은 공간에서 특별한 인터뷰를 할 기회가 생겼으니 유머를 곁들여서 물어봤다.
나 : “혹시 제가 지나갈때 감독님이 ‘야 저자식 치워’라고 오더를 하셨나요?”
스탭 : “아 ㅎㅎ 그렇게 까지는 말씀 안 하셨고…”
말끝을 흐렸다. 어? 진짜 저랬나?
나 : “옛날같으면 길 다 통제하고 그랬을 텐데 요즘은 그렇게 안 하나 봐요?”
스 : “모든 현장은 케바케이고 감독바이감독이다.”
어떤 촬영은 뭐 대단한 권력 잡은 것처럼 건방지고 우악스럽게 시민 통제하기도 해서, 이런 사례를 생각하며 물어봤는데 그 스태프는 마치 한국영화협회 임원의 대답처럼 정답에 가까운 답변을 해주었다.
이때 영화 제목이 뭐냐, 누구 나오냐 물어보고 싶었지만 뭔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제목도 아직 안 정해졌을 것 같아서 묻지 않았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감독 이름이 뭐냐를 물어보는 게 가장 좋은 질문이 아닐까 뒤늦게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내 시간을 통제당한 비용으로 짧은 깜짝 인터뷰를 마쳤고 즐겁게 약속 장소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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