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귤을 좋아한다.
아주 달고 시고 단단하며 나무에서 갓 딴 듯한 신선한 것이면 더더욱 좋다.
다들 그런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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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잘 알려진 귤 맛있게 먹는 법이 있다.
신 귤은 손으로 주무르거나 던지면 당도가 더 오른다.
알아보니 이는 사실이며 신맛을 내는 유기산이 귤 전체에 고르게 퍼지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신맛은 약해지고 단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원리라고 한다.
귤 애호가로서 종종 이 방법을 써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귤이 맛없었다.
내가 단지 귤 뽑기를 잘못해서 맛없는 귤을 뽑은 줄로만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나는 신 귤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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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아주 핫한 과일 샤인머스켓이라는 청포도 품종이 새로 나왔다.
높은 당도와 신맛이 없어서 인기를 끌었다.
나는 얘를 먹기 전부터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너는 내가 선호하는 비주얼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청포도는 아래와 같은 친구다.
포도알은 탱글 탱글하며 흰 가루가 잔뜩 껴있고 껍질은 얇지만 단단하며 입안에서 톡톡 터진다.
내 기준은 기존 칠레산 청포도가 훨씬 맛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를 싫어한다.
다들 공감 못 하겠지만 샤인머스켓은 껍질도 굵고 질기며 그저 달기만 해서 맛이 심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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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추석에 내려가니 엄마가 하우스감귤을 한 박스 샀다.
근데 너무 맛이 없어서 내가 다 먹으라고 줬다.(물론 엄마는 내가 이걸 좋아하는 걸 안다.)
귤은 딱 저렇게 생겼다.
과육과 껍질은 단단하고 껍질은 잘 벗겨지지도 않을만큼 얇게 과육과 밀착되어 있고 듬성듬성하게 초록빛을 띠었다.
식사 도중에 참지 못 하고 싱글벙글하며 귤을 하나 까먹으니
역시 내가 좋아하는 그 맛이다.
이 맛을 혼자만 아는 것은 즐거우면서도 외로운 일이다.
이 맛을 아는 귤 소수자, 포도 소수자가 어딘가에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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