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터 : 시청자 여러분들께서도 이미 잘 알고 있으시겠지만 지난 2월3일, 신길역에서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진 직장인 여성 장 모씨에게 한 남성이 곧장 달려가서 상태를 확인한 뒤 심정지를 확인하고 심폐소생술 및 제세동기를 부착하여 빠른 응급처치를 취한 뒤 119 대원에게 인계하였습니다.
그당시 CCTV에서 한 남성이 멀리서 장 씨가 쓰러진 것을 보자마자 허리 높이의 차단막을 앞으로 쓰러지듯이 뛰어넘어 가는 것이 선명하게 찍혀있습니다. 이를 두고 네티즌들은 신길역 수퍼맨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자! 저어엉말 어렵게 모셨습니다. 오늘은 신길동의 시민 영웅. 일명 신길역 슈퍼맨님 모셔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슈퍼맨 : … 예
리포터 : …? 자.. 다들 도대체 이 사람 누구냐! 너무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슈퍼맨님께서 익명을 요청하셨기 때문에 익명으로 진행한다는 점, 시청자 여러분께 양해 부탁드립니다. 신길역 슈퍼맨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슈퍼맨 : … 그러시죠.
리포터 : …어 수많은 인터뷰 요청이 있었는데 전부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언론의 노출을 피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슈퍼맨 :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리포터 : 그럼 저희 인터뷰에는 응하신 이유는 뭔가요?
슈퍼맨 : 양심에 찔렸기 때문입니다. 금방 잊혀질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소문이 부풀려졌고, 유튜버와 기자들이 집 앞까지 찾아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찾아오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영웅이라는 얘기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매체인지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때 마침 연락이 와서 응하였습니다.
리포터 : 양심에 찔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슈퍼맨 : 그 사람을 구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저는 평소에 여성을 절대 돕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제가 깜짝 놀라서 그분을 외면하고 도망쳤더라면 여러분들은 저는 비난하셨겠죠. 저는 똑같이 말했을 겁니다. “그 행동을 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다만 운이 좋게도 긴급 상황에서 제가 한 행동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뿐입니다.
그당시의 기억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너무 많은 것이 진행되었습니다. 제가 그분의 외투를 벗기고 겉옷도 올린 뒤에 제세동기를 부착하고 있더군요… 아 이 부분은 인터뷰에서 빼주세요. 아무튼 그때쯤 제정신이 돌아오며 얼굴이 확 뜨거워졌습니다. 저는 당장 도망치고 싶었지만,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도망칠 수도, 멈출 수도 없었어요.
분명한 것은 그때도 저는 제 생각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될지. 어떤 도움을 줘야할 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타개할지,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할 지만 생각했다는 겁니다. 제가 응급처치를 멈추지 않았던 것은 처치를 계속하는 것보다 멈추는 것에 더 큰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일 뿐입니다.
지금 바라는 것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여성분이나 가족들이 저에게 책임을 묻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리포터 : 아하.. 굉장히 겸손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급할 때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의 본모습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슈퍼맨님께서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으시군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시죠.
슈퍼맨 : 누군가 긴급한 상황에서 나온 행동과 판단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주세요.
강도가 나타나자 여자 친구를 버리고 도망간 남자의 선택이 그의 본모습은 아닙니다.
면접 탈락 문자를 받고 순간적인 분노로 던진 돌에 비둘기가 맞아 죽었지만, 그가 그러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게 그의 본모습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신호 위반하는 차량과 사람이 부딪힐까 봐 액셀을 밟아 사람을 구한 것은 그 사람의 판단이 아닙니다. 단지 순간적인 반응이었을 뿐입니다.
화재가 난 건물로 들어가서 모든 집 문을 두드리고 사람을 구출한 영웅은 그의 본모습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인터뷰 때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하겠다고 했고, 그것은 그의 본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시민 영웅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구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저는 영웅이 아닙니다. 저는 좋은 사람도 아닙니다. 이런 사람이라서 죄송합니다. 제발 더 이상 저를 찾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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